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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9 연중 34주 금 묵상강론 루카 21,29 – 33 [죽음이란]


20241129 연중 34주 금 묵상강론 루카 21,29 – 33
[죽음이란]

우리는 이제 전례력으로 한 해의 끝을 바로 앞에 두고 있습니다. 내일 안드레아 축일만 지나면 우리는 새해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번 주간 우리는 1독서를 통해 계속 묵시록의 이야기들을 만나왔고, 복음을 통해 종말과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저도 제 개인의 삶에서 죽음과 종말의 의미를 찾는 묵상을 해왔습니다. 최근에 저는 죽음과 관련된 두 가지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저의 삶에서의 죽음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에서 생각하도록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라지지 않을 예수님 말씀의 의미도 묵상하게 해 주었습니다.

하나는 며칠 전 양 바오로 신부님의 강론을 통해서 들었던 고등학생 아이의 이야기였습니다. 저희가 운영하는 시설에 살던 그 고등학생의 꿈이 3억 원을 벌어서 폼 있게 사는 것이었는데, 어느 날 그거 번 다음 날 죽으면 어떻할래 라는 함께 산행하던 신부님의 질문에 멘붕이 와서 한동안 힘들어하더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가 죽음에 자주 관심을 주는 것 같고, 수도자들은 끝기도 마지막에 매번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일에서 죽음과 떨어진 결정을 합니다. 오늘 옷을 살 때 몇 년 동안 입을 생각으로 사고, 건물을 지을 때 몇십 년을 살 생각으로 짓습니다. 내일 죽음이 있을 거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아마 조금 다른 선택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멀리 두고 오래 살 것처럼 노력하고, 죽음을 가까이 두고 내일 죽을 것처럼 성찰합니다.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의 삶을 달라지게 하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희망입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본질적이고 압도적인 한계입니다. 여기서 신앙이라는 것을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 기초신학의 기본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죽음이나 종말은 끝이 아닌 희망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해결되지 못한 억울한 일들이나 알려지지 않은 선한 일들이 죽음 이후 제대로 대접을 받게 된다는 교리는 가톨릭 4대 교리 중 하나인 상선벌악입니다. 이 교리는 악을 저지른 자들이 호의호식하는 이 세상에서 그래도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 희생 봉사할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작게는 우리 수도회 공동체를 위해 조금 더 보이지 않는 노력을 기쁘게 기울이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며칠 전 상담을 해드렸던 어느 분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신자가 아닙니다. 큰돈은 아니지만 매일매일 열심히 발로 뛰며 일을 하고 열심하고 열정적으로 삶을 살던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지금 심한 우울감과 실망감으로 크게 힘들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이유로 갑자기 큰 부를 얻게 되었는데, 그것 때문에 친한 이들과도 멀어지고 아무에게나 편하게 말을 못 하고, 행복은커녕 주변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지난 삶에서의 열심한 노력의 의미가 하찮아지는 듯한 상실감에 힘들어하고 있는 겁니다. 그야말로 사는 동안 하나의 죽음을 맞이한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상담 후에 지금은 다시 힘과 기쁨을 찾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날 상담을 끝낸 후 몇 일동안 저의 삶을 돌아봤습니다. 내 삶에도 분명 이런 죽음들이 어떤 형태로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목표를 위한 노력, 하느님과의 약속, 공동체를 위한 희생, 형제들에 대한 사랑, 피조물에 대한 관심, 약하고 외면당하는 이들을 위한 분노, 남보다 나를 더 면밀히 성찰하고자 하는 노력, 입회할 때의 첫마음. 성찰하며 묵상 글을 쓰는 잠깐의 시간 동안에도 제가 저의 삶에서 맞고 있는 많은 죽음을 저는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죽음들은 저를 더 지치게 하고, 더 낙담하게 하고, 더 슬퍼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상담하는 동안 사실은 저도 제가 상담을 해드린 분과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고, 또 그분에게 드린 질문들이 사실은 나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넘어가기 위해 나는 오늘 작은 기쁨들을 찾는 노력과 죽음 너머에 희망을 두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그리고 내일 우리는 한 해의 끝에 서서 죽음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죽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래 살 것처럼 노력하게 하고, 내일 죽을 것처럼 성찰하게 하며, 부조리한 세상에서 기꺼이 보이지 않는 희생을 하게 합니다.
죽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동안에도 계속 만나며, 그 만남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잘 넘어가기 위해 오늘 작은 기쁨을 찾으며 죽음 너머에 희망을 두는 연습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이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예수님의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