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에서 묵상하기

[우리는 왜 서로를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거지?]

20240723 연중 16주 화 묵상강론 마태 12,46-50

[우리는 왜 서로를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거지?]

 

 

 

 

 

식당 같은 곳에 가면 벽에 십자가나 복음말씀이 걸려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은 그런 것을 보면 주문을 할 때 꼭 이렇게 또박또박 이야기 하십니다.

 

“자매님, 여기 순대국 하나 주세요!”

 

우리가 처음 만나면서도 서로를 형제 자매로 부르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가 낯선 이국 땅에서 처음 만난 외국사람과도 성당 다닌 다는 것 만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건 무엇때문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족의 의미를 다시 규정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족이란 것도 하나 하나 따져보면 평소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느껴지게 됩니다.

 

흔히 가족을 피로 맺어진 관계라고 하지만 가족이 시작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피로 맺어진 관계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피로 맺어져서는 안되는 관계라 할 수도 있습니다.

또 부모와 자식 간에는 피로 맺어졌다 할 수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소중한 일인 입양을 통해 맺어진 아름다운 가족들도 많이 봅니다. 또 재혼을 통해서 어제까지 남남이었던 사람들이 가족 친척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가족은 하나하나 뜯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다양하고 현실적인 형태입니다. 조금 더 건조하게 말하면 이들이 가족인 것은 부부 간의 혼인 계약에 가장 크게 기인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혼인 계약을 성사로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가톨릭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 가족의 전통적인 의미를 다시 규정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 12,50)” 

 

이것은 계약에 따라 함께 살고 있는 지금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시간적 제한’를 없애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이건,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대의 사람들과 우리는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순간 그렇게 되는 거죠.

 

 

오늘의 복음을 묵상할 때면 항상 저에게 따라오는 또 하나의 복음 말씀이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보통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라는 의미로 묵상합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또 하나의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이웃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함께 가까이 사는 사람들을 뜻했고 이웃이 아닌 사람들,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이민족들에게는 사랑을 베풀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이렇게 이웃을 새롭게 규정하십니다.

 

‘이웃이란 네 가까이 사는 사람들 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이웃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 이웃이라는 ‘공간적 제한’을 없애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순간 그렇게 되는 거죠.

 

 

오늘 내가 가지고 있는 가족과 이웃에 대한 생각들을 곰곰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가족와 이웃의 새로운 의미를 함께 묵상해 보면 어떨까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 처음 만나도 형제 자매라 부를 수 있으며, 이미 돌아가신 신앙 선조들과 앞으로 태어날 후대 사람들과 하나의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과 통공할 수 있으며, 앞으로 다가올 세대들을 위해 지금 지구를 아끼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들을 위해서요.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과 아웃 그리고 가족이 되기 위해 오늘 하루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려 노력하며 살려고 합니다.

 

 

 

 

예수 성심 온 세상에서 사랑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