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자와 역사

선교를 꿈꾼 사람

 

예수성심전교수도회는 1854년  12월 8일 초록빛 풀이 우거진 프랑스 로이어 계곡에 둘러싸여 아늑하게 자리잡은 이슈뎅의 작은 마을에서 창립되었습니다. 

 

슈발리에 신부님의 노년모습

 

창립자 쥴 슈발리에 신부님은 30살이 되던 해에 마음 속에 매우 특별한 목표를 하나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연민과 자비의 사랑을 위해 종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당시 역사의 격동기를 겪고 있던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생때부터 슈발리에 신부님은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같은 뜻을 가진 젊은 사제들의 작은 모임과 그의 결의를 나누었고, 이것은 작은 씨앗으로 세상에 뿌려졌지만 지금은 2,000명이 넘는 예수성심의 선교사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마음으로 종사하는 활동으로 열매 맺고 있습니다.

 

 

소박한 시작

 

오늘 날까지도 밝게 불타고 있는 쥴 슈발리에 라는 이름의 젊은 사제가 밝힌 한 줄기 희망의 불꽃과 사랑, 그 예수성심전교수도회 이야기의 시작은 19세기까지 거슬러 갑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였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메세지를 세상과 나누는 것’.

 

슈발리에 신부님은 1824년 3월 5일에 프랑스 파리 남서쪽에 있는 시골의 작은 마을 리슐리외라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셨습니다. 

 

신부님의 아버지 쟝 슈발리에는 신앙의 믿음을 갖지 않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분이셨습니다만, 사업적으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하셨습니다. 슈발리에 신부님의 어머니 루이스 오리에게는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학교에 간 적도 없고 글을 읽거나 쓸 줄을 모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뿌리 깊은 믿음을 갖고 있었고 이 믿음은 아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슈발리에 신부님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글을 쓰는 법과 읽는 법을 배웠고, 어머니에게는 하느님 사랑의 메세지를 들으며 자랐으며, 그러는 동안 사제가 되기 위한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앙의 삶을 살고자 하는 슈발리에 신부님의 결심은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가족은 빈궁한 삶을 살고 있었고, 신학교의 학비를 대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벅찬 일이었가 때문입니다. 그래서 슈발리에 신부님은 17살이 되던 때에 학교를 나와 구두 수선공 견습생이 되었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용주의 고마운 도움으로 신부님은 성소를 지킬 수 있었고, 바라던 대로 교구의 소신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망과 열망

 

슈발리에 신부님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시기의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이 일으킨 물결이 격동치던 시기였습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 이전의 가치들을 지키려고 봉기를 하고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혁명 이후 사회가 제공하던 새로운 기회를 무자비하게 추구하며 미래를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동요는 종교계를 향해서는 무관심, 분개, 적개심 등으로 다가왔습니다. 

 

슈발리에 신부님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 속에 계셨지만, 그의 꿈은 욕망이나 개인적인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슈발리에 신부님이 꿈꾸던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 사랑의 경험에 기초하여 세워진 세상이었습니다. 

 

슈발리에 신부님은 학업을 계속하면서 세상과 인간들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이 사랑이 행동하는 믿음에 장착되고, 매일의 삶에서 살아지고 믿어진다면, 사회가 만든 많은 분열들, 부자와 가난한 자, 힘있는 자와 억압받는 자, 특권을 가진자와 변두리로 몰린 자들 사이의 거리를 극복할만큼 충분히 강한 사랑의 힘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 또한 깨달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슈발리에신부님_마음의 영성용 사진
슈발리에 신부님의 젊은 사제 때의 모습

 

복음에서 슈발리에 신부님은 아픈 이들, 억압받는 이들, 가난한 이들, 그리고 차별받는 이들에게 판단함 없이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갔던 예수님에게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뚜렷하고 선명하게 보았습니다. 그 사랑에 영감을 받은 슈발리에 신부님은 새로운 목표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사랑의 메세지를 괴로움과 절망과 좌절에 빠져있는 세상에 전하는 일을 하려는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 협력사제들과 수도자들과 평신도 단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두 상처가 우리 불행한 세상을 부패하게 하고 있습니다. 무관심과 이기심입니다.

이 두 악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 효과적인 치유제가 필요합니다. 이 치유제는 온전히 사랑이신 예수성심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심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할 사람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들을 이 이름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예수성심전교수도회(예수성심의 선교사들) ”

-쥴 슈발리에 MSC, 1856

 

 

함께 나눈 비전

 

서품을 받고 나서 슈발리에 신부님은 세 곳의 본당의 보좌신부로 부임했습니다.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이슈뎅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이슈뎅은 당시 교구 전체에서 가장 반그리스도교화 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또 다른 한명의 보좌신부는 신학교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들 중 한명으로, 슈발리에 신부님의 비전을 함께 나누었던 에밀 모쥬네 신부님이었습니다. 두 신부님은 힘을 모아 예수성심전교수도회의 첫 공동체를 만들어 이슈뎅에서 잃어버렸던 신앙을 다시 찾고자 했습니다.

 

당시의 교구의 주교님은 다른 교구의 신부들처럼 슈발리에 신부님의 선교열망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역전시키고 주교님의 의견을 바꾼 것은 계속된 일련의 기적들이었습니다. 

 

슈발리에 신부님과 모쥬네 신부님은 당신들이 바른 길을 가고 있고, 또 그 길이 하느님의 뜻과 부합한다는 어떤 징표를 주시기를 청하며 기도했습니다. 이 징표는 1854년 12월 8일, 교황님께서 원죄없이 잉태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교의를 선포한 날 두 신부님에게 내렸습니다. 이 날을 위해 두 신부님은 희망과 기도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그 징표를 주시기를 간구하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9일 기도를 드렸습니다.

 

두 신부님이 9일 기도를 끝낸 다음 날 아침, 신자 중 한 명이 사제관을 방문하여 갖고 온 편지를 전해 받았는데, 거기에는 익명의 기부자로부터 20,000 프랑을 봉헌하겠다는 약속이 적혀있었습니다. 기부자는 자신의 기부금이 자신이 지정하는 특정한 목적으로 사용될 것을 원했습니다. 그 지정된 목적은 대주교의 승인 아래 그 지역에 선교센터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대주교님은 수도회 공동체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아 동의 하셨고, 두 신부님은 다시 그 조건을 갖출 수 있기를 청하며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명의 기부자가 매년 1,000프랑을 기부하겠다는 연락을 해 왔습니다. 이는 슈발리에 신부님과 모쥬네 신부님이 재정적으로 자립하기에 충분한 금액이었습니다. 두 신부님은 수도회를 만들기 위해 바라던 징표를 얻었다는 것과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마련되었다는 것에 기뻐하였습니다.

 

두 신부님은 첫 기부금으로 집과 창고가 딸린 허름한 포도밭을 구입했습니다. 이 집은 그들의 첫번째 공동체 집이 되었고, 창고는 예수성심전교수도회의 첫번째 경당으로 개조되었습니다. 이 경당은 이후 예수성심의 어머니 대성당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지금도 이슈뎅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프랑스 시골에 있는 개조된 창고에서부터 성장해온 예수성심전교수도회의 모든 회원들, 사제, 수사,수녀, 평신도 친교회원 들은 창립자 신부님의 비전을 함께 하며 지금도 전 세계에서 함께 한 가족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메인 메뉴용 이슈뎅 모원 사진
프랑스 이슈뎅 모원의 예수성심의 어머니 대성당  내부모습

 

세계적인 노력

 

19세가 후반은 격동의 시대였고, 프랑스 안에서의 종교에 대한 박해가 거세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성심전교수도회를 포함한 많은 수도회들은 프랑스를 떠나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이는 갓 태어난 예수성심전교수도회를 꺽는 대신 오히려 진취적으로 수도회가 유럽으로 전파되게 했고, 개발 중인 국가들에서의 첫 선교를 시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빈약한 재정과 인력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슈발리에 신부님은 1881년 오세아니아(지금의 파우아 뉴 기니)에서의 선교에 대한 교황님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창립한 지 25년 안에 예수성심전교수도회는 유럽과 북미 지역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1907년 슈발리에 신부님은 선종하시기 전 그의 비전이 수도회 가족들에 의해 중남미, 인도네시아, 호주, 그리고 태평양 군도 들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슈발리에 신부님의 선종이후에도 수도회의 성장은 계속되었고, 2004년에는 세계 곳곳의 회원국에서 창립 150주년을 기념했습니다. 오늘날 슈발리에 가족인 예수성심전교수도회, 예수성심의 어머니 딸회, 예수성심전교수녀회, 예수성심 친교회들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호주,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50여개 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수성심전교 수도회는 현재 1명의 추기경, 23명의 주교를 포함한 2,000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슈발리에 가족의 선교사제들, 수사들, 수녀들, 그리고 친교회 회원들은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그들이 어떤 곳에 있든 어떻게 고통받고 있든 상관없이, 필요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려는 서원을 실천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성심전교수도회 창립 150주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예수성심전교수도회의 계속되는 활동을 기념하셨습니다.

 

 

“ 쥴 슈발리에 신부님은 예수성심전교수도회를 하느님과 인류의 만남의 장으로 보았습니다. 분명히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이 인류를 향해 아낌없이 주어지는 것은 예수성심으로 부터입니다. 인류가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은 예수 성심 안에서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마음의 영성’으로 초대하시며, 당신의 내려놓음, 순명, 용기, 신실함 그리고 사랑을 닮도록 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대들이 교회 안에서 또 세상 속에서 그대들의 부르심을 완수해 나가는 동안, 계속하여 이 영성으로부터 또 그대들의 창립자의 카리스마로부터 영감과 힘을 계속 퍼 올리시기를 열렬한 마음으로 희망합니다. 그대들은 기억하고 이야기 나눌 만한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진 것 뿐만 아니라, 아직도 더 써가야 할 원대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미래를 보십시오. 성령께서 더 큰 일을 위해 당신들을 보내시는.”

 

「봉헌 생활」(Vita Consecrata),110. 2004년 7월 1일

 

한국진출

 

저희 수도회의 한국진출은 1985년 2월 17일, 필리핀 관구에서 길반석 신부를 필두로 재단일, 파민교 신부님이 한국 땅을 밟음으로 시작됐습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수도원 건물을 마련하였고, 이어 부산교구에서의 해양사목 활동 등 한국에서의 선교활동 범위를 넓혀가며 예수성심의 사랑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양성, 피정사목, 청년사목, 사회복지사목, 병원사목, NGO 활동, JPIC(정의평화창조보전)활동 등 다양한 사도직을 펼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