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부활 5주 묵상강론 요한 15,1-8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과 질문의 관계]
20240428 부활 5주 묵상강론 요한 15,1-8[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과 질문의 관계]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신학교 1학년 이스라엘 역사 수업시간의 한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그날의 수업에서도 이집트인들을 홍해 바다에 빠져 죽게 하시고, 갓 태어난 아이들이 칼에 맞아 죽게 하시고, 전쟁에서 이방인들을 내치시는 편애와 폭력의 하느님, 사람들의 울음과 절규 앞에 가만히 계시는 침묵의 하느님의 모습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마음을 크게 먹고 질문이 있다며 손을 들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손을 들자마자 주변 동기 학사님들이 고개를 숙이며 ‘아~~’하고 탄식하는 마음의 소리들이 크게 들렸습니다.
“신부님, 수업에서 전쟁에서 계속 사람들을 죽게 하시거나 이스라엘의 적인 사람들을 쳐 죽이시거나 갓난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죽게 하시는 구약의 하느님의 폭력적이 잔혹한 모습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교실은 순간 얼음장이 되었고 ‘아~’하는 동기 학사님들의 탄식은 교실 천장을 찔렀습니다.
“그건 말이야… 문자적으로만 보면 안되고”
교수님의 얼굴도 웃음과 함께 붉어지셨습니다. 그 순간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이 쳤고, 신부님은 다음 수업시간에 보자며 수업을 끝내셨습니다. 신부님이 교실을 나가자 마사 주변에서 저에 대한 원망이 쏟아졌습니다.
‘아 ~ 그냥 듣고 있지 왜 질문을 해 ~~!’
‘아 형 미쳤어? ‘
‘아 형 그냥 조용히 있지 왜 그런 걸 질문해?’
‘야, 너거들은 그럼 다 이해하고 듣고 있는거가?’
‘그건 아니지만…’
사실은 그들도 모두 같은 질문이 마음에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뭔가 질문해선 안된다는 그런 막연한 무언가가 우리에게는 있었던 겁니다. 질문하면 내가 못나 보인다던가, 신부님을 곤란하게 할것이라든가, 아니면 화나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들 너무나 잘 아시듯, 우리는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특히 모르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심에서 영성으로 가는 길이며, 또 예수성심신심에서 마음의 영성으로 옮겨 가는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복음에서도 저는 이런 질문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잘 붙어 있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다 쳐내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매우 곤혹스럽습니다. 매일같이 우리가 고민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부족한 믿음과 얕은 기도와 일상에서 자주 예수님을 잊고 산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안 그래도 이런 일들로 괴롭고 힘든데, 이렇게 계속 살면 하느님께 마저 내쳐짐을 당할 것이라고 하니, 나를 이렇게 연약한 존재로 창조하신 하느님이 더 원망스럽고 예수님도 야속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어서 당신 안에 머무르면 청하면 다 이루어지고, 많은 열매를 맺으면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라고도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가 예수님 안에 머무르고 있지 않은 것인 듯하여 이 말씀도 또한 나를 괴롭게 합니다. 이렇게 기준을 주시고 못하면 내치시고 기도도 들어주지 않으신다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이 용서와 사랑의 하느님 예수님에게 익숙해져 있는 저에게 오늘따라 무척 생소하고 또 섭섭하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질문하게 됩니다. “이런 하느님을 나는 오늘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
이 질문에 대한 묵상 중에 저는 이번 부활시기동안 집중하고 있는 토마스 사도를 다시 떠올립니다.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이 하신 일은 못자국이 있는 구멍난 손과 옆구리를 내어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고 믿게 됩니다. 또 다른 부활의 장면에서도 예수님은 물고기를 구우라고 하시고 식사를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증명하시는 행위가 처음에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졌지만, 이내 계시라는 단어의 정의가 떠올랐습니다. ‘초월자이신 하느님께서 스스로를 당신과 당신 구원의 계획을 인간에게 드러내고 보이시는 것.’ 예수님의 이 행위는 하느님께서 처음 인간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행위와 같은 계시의 의미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인간을 위해 낮고 낮은 수준으로 우스꽝스럽게까지 하신 계시의 행위였고, 오늘 묵상 중에 저에게도 당신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
“이런 하느님을 나는 오늘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저는 오늘도 했습니다. 답답하고 섭섭하고 또 외롭지만, 저는 이 질문을 앞으로도 계속해야 할 것을 압니다. 그리고 오래 전 얻은 기도의 응답을 다시 생각합니다.
‘네가 질문을 멈추지 않는 한 너는 예수님에게 붙어 있을 것이며 예수님도 네 안에 머무르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도 오늘 하루 질문과 함께 예수님에게 붙어있는 그래서 서로의 안에 머무르는 하루 체험하시길 기도드립니다.